로컬 칼럼, 전문가 칼럼

[행복칼럼] 강태광 목사 – 행복의 정의!

강태광 목사
월드쉐어USA 대표

서기 79년 화산으로 사라진 로마의 도시 폼페이가 18세기 이후에 발굴되었다. 철저하게 로마화를 지향했던 폼페이에는 의미 있는 유적들이 많았다. 발굴된 유적 가운데 폼페이 어느 빵집에 걸려있었던 액자가 화제가 되었다. 라틴어로 된 그 액자에는 “이 집에 행복이 살고 있다!”는 문구가 적혀있었던 것이다. 당시 로마사람들의 의식을 읽을 수 있는 중요한 단서다. 로마 사람들은 행복을 갈망했다. 그들은 행복이 깃들어 있는 빵집에서 빵을 먹기를 원했다. 빵 한 조각을 먹으면서도 그들은 행복을 갈망했었다.
모든 인생은 행복을 갈망한다. 행복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헬라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사유의 주제가 행복이었다. 철학자였던 아우구스티누스 황제가 흠모했던 노예 출신 철학자 에픽테토스(Epictetus)도 행복학자였다. 에픽테토스는 절제와 품위 있는 인격으로 누리는 행복의 본질을 주장했다. 그는 노예 출신이었지만 당당했고 담대했고 여유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가르침을 실천한 품격 있는 행복학자였다.
칼럼리스트 김길호씨가 플라톤의 다섯 가지 행복 조건을 소개한 적이 있다. 김 씨가 소개한 플라톤 행복 조건 다섯 가지는 재산, 용모, 명예, 체력 그리고 화술이다. 좀 더 설명하면 이렇다. 첫째, 먹고 살만한 수준에서 조금 부족한 듯 한 재산. 둘째, 모든 사람이 칭찬하기에 약간 부족한 용모. 셋째, 자부심은 높지만 사람들이 절반만 알아주는 명예. 넷째, 한 사람에게 이기고 두 사람에게 질 정도의 체력. 다섯째, 청중의 절반은 손뼉을 치지 않는 연설 솜씨. 등등이다. 절묘한 행복 조건들이다. 플라톤의 행복 조건은 절제미 넘친다. 헬라 철학자들은 행복을 끊임없이 행복을 탐구했었다.
중세 철학의 양대 산맥이었던 스토아학파와 에피큐리스학파 논쟁도 결국 행복론에 대한 논쟁이었다. 스토아학파는 절제의 행복을 강조한다. 반면에 에피큐리안은 쾌락을 적극적으로 즐기는 것이 행복이라고 주장한다. 행복에 대한 접근이 이들을 철학적 사유와 활동을 구분 짓는 기준이었다. 중세 철학의 핵심주제도 행복이었다.
얼마 전 버지니아대학 오이시 연구팀은 ‘행복’에 관해 흥미로운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행복’의 사전적 정의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살핀 것이다. 그들은 1850년부터 지금까지 출판된 웹스터 사전 개정판들을 살폈다. 웹스터 초기 사전에서 ‘행복’은 ‘좋은 운’이었다. 그러나 1961년 이후 행복의 사전적 정의는 ‘삶에 대해 스스로 만족하고 기쁜 상태’로 변했다. 요컨대, 행복 개념은 조건에 따르는 ‘좋은 운’이라는 정의에서 ‘개인이 추구할 수 있는 삶의 만족스러운 상태’라는 개념으로 전환된다. 최근 긍정 심리학자들은 행복을 대체적으로 ‘주관적 안녕감(Subjective Well-being; SWB)’과 삶의 만족감으로 정의한다. 다소 애매한 정의들이다.
그러나 성경은 행복에 대한 매우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정의를 보여준다. 시편 1편은 행복한 사람을 명쾌하게 설명한다. “행복한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삶을 따르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들처럼 높은 자리를 탐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사는 사람입니다(필자주).” 행복은 하나님 뜻을 마음에 품고 진실하고 정직하고 겸손하게 사는 사람이 누리는 것이다.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